선조문집
노초공(老樵公) 행장(行狀)
공께서는 영응대군의 10대손이시며 임은(林隱) 민곤(敏坤)의 장자이시다. 수성수(隋城守)의 차자이신 광진부수(廣津副守)께서 7 대 조가 되시고 광진부수의 현손이신 만재(萬材)께서 공의 증조가 되신다. 공은 1725년(乙巳) 음력 2월 27일에 태어나셨고 1788년(戊申) 음력 2월 24일에 돌아가셨다. 공의 휘는 송(淞)이시고 자는 무백(茂伯), 고청(孤靑)이셨으며 호는 노초(老樵), 서림(西林), 장남궁사(漳南窮士) 등을 사용하셨다. 공께서는 당대의 학자이셨던 여호(黎湖) 박선생(朴弼周) 문하에서 공부하셨으니 부친 임은공과 함께 동문수학하신 것이다. 이는 공자의 문하에 증자와 안연이 그들의 부친과 같이 수학한 것과 같으니 학문을 숭상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공께서는 영조 29년 (1753) 식년시(式年試)에서 급제한 후 더 시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시고 학문의 길로 정진하셨다. 당시는 붕당이 극에 달해 부친이신 임은공께서는 사간원에 봉직하시면서 노론의 후설지신(喉舌之臣정당 대변인)을 자임하시던 시기였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친께서 거제도 유배에 이어 또 다시 육진(六鎭)으로 귀양 가실 때 노초공을 대동하고 귀양길의 노정을 기록하게 하셨다. 찬바람이 몹시 불어대던 늦가을(음력 10월 6일) 깊은 밤에 유배 도중에 묵으셨던 금성(金城) 창도역(昌道驛)의 숙소에 큰 불이 나서 방안이 자욱한 연기와 불길로 휩싸이게 되었다. 임은공께서는 잠들어 있는 아드님을 발로 차 깨워 밖으로 내보내시고 자신은 방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당시의 극심한 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구차한 연명을 포기하신 것이다. 노초공의 9대손인 불초는 밖에서 “아버님! 아버님! 빨리 나오세요!” 혼절하듯 외치셨던 노초공의 모습을 떠올리면 언제나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이 사건 이후로 공께서는 다시는 관로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셨다. 조선홍문사(朝鮮弘文社)에서 펴낸 『조선고금명현전(朝鮮古今名賢傳)』에는 노초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자(字)는 무백(茂伯), 호(號)는 노초(老樵), 전주인(全州人)이다. 임은민곤(林隱敏坤)의 아들이다. 여호박필주(黎湖朴弼周)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과거에는 별 뜻을 두지 않았다.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에 아버지를 따라 귀양지에 갔다가 금성(金城)의 참변을 직접 본 뒤로 두문불출하다가 서산(西山)에 은거하였다. 곤궁하게 거처하며 독서하여 수양이 지극해지고 문장이 날로 높아졌으며, 지조와 덕행이 마치 맑은 얼음과 티 없는 옥처럼 깨끗하였다. 세마(洗馬)와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께서는 양주의 장흥 일영리에 있는 수성수부터 증조고까지 계신 선영을 지키며 평생을 그곳에 기거하셨다.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며 글을 짓고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셨다. 특히 교분이 두터웠던 분으로는 담험 홍대용 선생이 있으며 연암 박지원 선생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연암께서는 노초공의 인품과 학문을 소문으로 듣고 늘 만나보기를 바라던 차에 일부러 공이 계신 일영리까지 와서 공과 함께 십여일을 지내다 가기도 했다. 담헌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연암은 묘지명을 짓고 공께서는 묘표를 쓰셨다. 2차례에 걸쳐 담헌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며 많은 시문을 남기셨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셨다. 그밖에 이덕무, 박문수 등 당대의 실학자들과 교류하셨다. 뛰어난 학문과 빙옥같이 청정한 문장이 있음에도 공께서는 밖으로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극구 꺼려하셨다. 생활은 매우 궁핍하고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근근이 생활하신 것 같다. 생활이 궁핍했음에도 도의를 소홀히 하지 않으신 풍모는 꽤 소문이 났던 것 같다. 연경제전집(硏經齋全集) 5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김백련의 사위인 세마 이송의 집은 무척 가난했다. 이송의 부인은 아버지가 영천(榮川)군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곤궁함을 구제해주기를 무척 바랐다. 한 해가 지나 비로소 관인을 보내왔는데 짐을 한 보따리 들고서 왔다. 이웃 마을의 동복들까지 모두 모여 떠들썩했다. 보따리를 풀어보니 삼강행실도 한 부가 들어 있었다. 책의 여백에는 애비가 딸 누구에게 보낸다고 하는 글씨가 적혀 있었고 관인이 찍혀 있었으며 파초뿌리도 3개가 함께 있었다. 그 글에는 부임한 곳에 와보니 삼강행실도가 아주 좋아 보여 관인을 찍어 네게 보낸다. 이곳에 있는 파초도 아주 크게 자라 보기에 좋아서 역시 네게 보내니 잘 길러 감상하기 바란다는 글만 적혀 있었다. 인품의 고결함이 이와 같았다.”
공의 아내이신 순천김씨의 곤공함이 얼마나 심각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생하는 딸에게 재산이 될 만한 것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결의에는 평소 사위가 보여준 의연함도 작용했을 것이다. 공께서 평생을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지켜온 결연한 삶의 태도는 분명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친이 불에 타 돌아가시는 참혹함과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강한 저항이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공께서 돌아가신지 대략 십 여 년 후에 일성록(日省錄)의 ‘효자 증직 별단(孝子贈職別單)’의 기사를 통해 당시 노초공이 겪었을 참혹한 심경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故) 세마(洗馬) 이송(李淞)이다. 계모를 섬기고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그의 아비의 귀양살이를 따라갈 적에 금성역(金城驛)에 이르러 한밤중에 불이 났는데 그의 아비는 이미 손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송이 곧장 불 속으로 몸을 던지려고 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힘껏 말려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관을 옮겨 장사 지내게 되어서는 묘를 지키면서 울부짖고 옷깃이 다 해졌으며 나물과 과일을 3년간 한 번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상례기간이 끝날 때가 되어도 빗질을 하지 않아 머리털과 살갗에 구더기가 생겼고 성묘할 때 울부짖으며 발을 구르자 사나운 호랑이가 와서 지켜 주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소년의 귀밑머리가 일시에 백색으로 변하고 몸이 점점 쇠약해지더니 병에 걸려 그 수명을 앞당겼다.”
우리 가문에는 제삿날 남자들이 걸쇠를 사용해 소변을 보았다는 엄격함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이는 노초공께서 보여주신 조상에 대한 애통한 심경이 후손에게 전해진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임은공 슬하에서 함께 자란 동갑내기 사촌인 이계(李溎) 공(公)이 수많은 관직을 거쳐 판서(判書), 대사헌(大司憲)까지 두루 역임한 것에 비해 공은 장릉참봉(莊陵參奉)과 세마(洗馬)가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결코 나가지 않으셨다. 돌아가신 후 사헌부 집의(執義)에도 추증되셨다. 일영리의 서산(西山)에 은거 하신 채 제자들을 키우셨으니 이계공의 장자 승달(承達)께서도 공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우리 가문에는 12제자를 키우셨고 양주의 서원에 배향되었었다는 사실이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한 면모는 알 길이 없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서원을 일제 때 인근 유지들이 재건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세상 밖으로 이름을 알리지 않으려 애쓰시던 공께서 다시금 세상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조 조 마지막 대 문장가이신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공의 글을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인보(寅普)가 난곡(蘭谷) 이장(李丈) 댁에 가서 이월암참봉집(李月巖叅奉集)을 보니, 권말에 서림(西林)이송(李淞)이 월암을 곡(哭)한 제문이 붙어 있다. 그 제문의 문사(文辭)가 심히 고상하였고 그 아래에는 대연(岱淵 이면백李勉伯)이 기록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참봉군(叅奉君)이 본래는 서림을 알지 못했는데 자회(子晦) 나열(羅烈)이 정릉(貞陵)의 수령이 되어 참봉군을 초청하매 참봉군이 그 관청에 이르렀는데 이때 서림도 마침 와서 같이 잤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소식이 서로 끊겼고 참봉군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람들 또한 서림이 참봉군을 곡한 제문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승지(承旨)인 강인(표암 강세황의 아들)이 일찍이 서림을 방문하여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참봉군에 대한 말이 나오니, 서림은 이 제문의 초를 내어 보였다. 강인이 빌어서 자기 집에 가져가려고 청하자, 서림이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그는 마침내 암송하여 돌아가서 기록하여 두었노라.’ 하였다. 이것을 보면 서림의 사람됨은 독특한 지조로서 세속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자취를 숨김에 힘썼으며, 남에게 알려짐을 부끄러워했었다는 것을 알겠으니, 그는 문장만 고상할 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작년 겨울에 담헌서(湛軒書)를 발간할 것을 계획하고 담헌이 엮어놓은 애오려제영(愛吾盧題詠)을 다른 사람에게서 입수하매 거기에 서림의 시 두 편이 있었으니, 마치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놀랍고 기뻤다. (중략) 서림의 두 시와 묘표는 이제 다 담헌서 뒤에 부록으로 붙이되 그가 월암(月巖)을 곡한 제문은 담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월암을 곡한 제문은 소위 '높고 높아서 마치 가을 구름이 아득히 높이 떠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마는 가까이 접근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격이라고 하겠다. 지금 담헌서를 발간함에 있어서 서림이 지은 담헌정려(湛軒亭盧)의 시와 묘표를 부록에 싣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서림의 인품과 문장의 대강에 대해 술급(述及)하여 이것을 여기에 붙이고 또 아울러 남을 곡한 제문을 수록하여 서림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규례를 넘는 실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서림의 시문이 전해지는 것이 아주 적어서 사정이 부득이 하니 규례는 경우에 따라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더구나 이 담헌서에 서림의 유편(遺篇)이 그 인연을 뻗쳐서 여기에 전하게 되니, 이것은 두 선생이 평생 같이 놀던 즐거운 뜻을 생각함에 역시 그 혼백도 가상히 여겨 좋아할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림은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의 계출이요, 자(字)는 무백(茂伯)이다.’ 라고 한다. 정인보는 삼가 기록함.“
근대의 마지막 문장가이신 위당이 돌아가신 후 고매하고 품격 높은 문장을 가늠할 수 있는 한학자는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위당과 노초공과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이다. 이로 인해 노초공을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 경기 지방의 성리학적 학문 환경 속에서 실학적 사고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연구하려는 학자들도 있고 위당의 평가에 힘입어 공의 빼어난 문장을 소개하려는 학자들도 있다.
공께서는 순천김씨(順天金氏)와 결혼하셨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어 동생(휘는 柏)의 장자인 승조(承祖)를 양자로 삼으셨다. 공께서는 어려운 살림에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 문집간행을 할 수 없었기에 생전에 평생 쓰신 글들을 모아 6책 12권의 노초집(老樵集) 필사본 2질을 만드셨다. 정본은 규장각에 납품하시고 한 부는 우리 후손에게 전해 주셨다. 부친(휘는 章烈)께서는 임은공의 문집인 임은유편(林隱遺編)을 복간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셨다. 노초집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전자서적으로 출간되어 이제 누구든 연구에 활용할 수 있게 공개되고 있다. 우리 가문에는 고조高祖대 까지 노초공을 불천위로 제사지낸 기록이 있어서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까닭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어진 덕성과 더할 나위 없는 효성, 그리고 만인이 칭송해 마지않는 빼어난 문장이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후손의 가슴에 긍지를 심어주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구나! 우리 후손들이여! 조상님들의 고결한 정신과 드높은 정신세계를 결코 잊지 말고 계승하여 오늘에 되살리려 노력할 진저!
2019년 6월 노초공의 9 대손 재룡在龍 삼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