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존 4대왕(목조·익조·도조·환조)
"목조(穆祖, ? ~1274년)는 고려의 문신으로 익조(翼祖)의 아버지이며,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이다. 이름은 이안사(李安社)이다. 17세 양무(陽茂)공의 아들로 전주에서 탄강하셨다., 고려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목조대왕은 대대손손 전주의 자만동(滋滿洞 : 현 校洞)에서 살다가 17세 양무장군공과 18세 목조대왕의 세대에 이르러 일족은 전주를 퇴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때는 1230년(고려 고종 17)으로 27세무렵의 일이었다. 목조대왕은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가 병력으로 전주이씨 일족을 굴복시키려 하자 살생의 화를 피하고자 부친인 양무장군공을 모시고 탈출하여, 전주의 동북쪽으로 회덕(懷德)ㆍ괴산(傀山)ㆍ제천(提川)ㆍ정선(旌善) 등을 거처 삼척(三陟)에 도착했다. 함께 따르는 일족과 외족이 170여 호나 되었다. 같은 해 목조대왕은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였다.
양무장군의 묘는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 신좌(辛坐)에 있다."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지 수년만에 다시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에 가까운 덕원(德源)으로 이주하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1235년(고려 고종 22)의 제3차 몽고병 침입의 행패가 가라앉을 무렵인 그 이듬해에, 공교롭게도 전일의 전주 산성별감이 강원도의 안렴사로 부임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릉과 삼척 사이는 해상교통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예전의 혐의로 화를 입을 것을 염려한 목조대왕은 다시 일족을 이끌고 미리 준비한 선단 15척으로 항로를 따라 동북면의 덕원부(德源府) 용주리(湧珠里:赤田社)로 이주하였다.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한 지 10여년 후인 1248년(고려 고종 35) ~ 1253년(고려 고종 40) 사이에 고려는 목조대왕을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쌍성(雙城 : 永興ㆍ和州) 바로 남쪽인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목조대왕은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해 온지 19년만에 다시 두만강 하류변의 알동으로 이주하였다. 알동(斡東)의 발음은 《위적사(偉跡史)》의 번역에선 와뚱이라 하고, 《왕조실록(王朝實錄)》 등에선 알동이라 하고 있다.〈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2장에 목조이거알동지지(穆祖移居斡東之地)라 기록되어 있으며, 위치는 두만강 입구에서 60리 더 올라가 국방상의 요충지인 경흥(慶興)에 있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899년(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와 이듬해(광무 4) 1월 18일에 전주 자만동(滋滿洞)에 고종황제가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라고 친히 쓴 비와 비각이 있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 현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의 계좌(癸坐)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 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의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이리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아들은 6남을 두었다. 사자(嗣子)는 익조대왕이고 차례는 넷째요,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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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조대왕(翼祖, ?~?)은 목조(穆祖)대왕의 넷째아들이며 도조(度祖)의 아버지,환조(桓祖)의 조부,태조(太祖)의 증조부이시다. 휘(諱)는 이행리(李行里)이다. 배위는 등주최씨(登州崔氏) 호장(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 정숙왕후 최씨이다. 능(陵)은 함경남도 안변군 서쪽 서곡현(瑞谷縣)에 위치한 지릉(智陵)이며 아내인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의 능(陵)인 숙릉(淑陵)은 함경남도 문천군에 위치해 있다. " 1275년(충렬왕 1)에 아버지로부터 천호 및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직을 세습하였다. 익조대왕이 알동(斡東)에서 세력을 다지고 있는 동안 원나라의 세조는 일본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 때 원나라의 원정군에 협력하였다. 알동에 살면서 안변·화주·함주에도 자주 내왕하여 활동영역을 넓혔다. 1300년에 원나라로부터 승사랑의 산계(散階)를 받은 것은 부원세력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닦고 있었으나 아버지 안사 때와는 달리 여진인과 마찰을 빚었다. 여진인들은 기성(崎城: 용비어천가에는 하관성(奚關城)으로 보임.)을 정찰하는 도중에 익조대왕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재빨리 두만강 하류의 적도(赤島)로 피해 화를 면하였다. 알동의 주민이 이 곳으로 옮겨와서 한동안 같이 살았다. 1290년(충렬왕 16) 직도(稷島)·추도(楸島)·초도(草島)의 재목으로 배 10척을 만들어 뱃길로 연고지인 의주로 옮겨와서 살다가 서거하셨다. 조선개국 이후 증손자인 태조에 의해 익왕(翼王)으로 추봉되었다가 고손자인 태종 때 익조(翼祖)강혜성익대왕(康惠聖翼大王)으로 재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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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대왕(度祖, ?~1342년 음력 7월 24일)은 익조대왕(翼祖)의 4남이시며 환조대왕(桓祖)의 아버지이며, 조선의 제1대 왕 태조고황제(太祖)의 조부이다. 휘(諱)는 이 춘(李 椿)이며, 아명은 선래(善來)이다 능은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한 의릉(義陵)이며, 배필인 경순왕후 박씨의 순릉(純陵)은 함경남도 흥남시에 위치해 있다. "원나라로부터 아버지인 이행리(李行里)의 천호(千戶) 관직을 계승하였다. 처음에 박씨(朴氏, 경순왕후)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자흥(李子興, 완창대군)과 이자춘(李子春, 환조)이다. 박씨가 사망하자 같은 고려인으로서 부원세력인 쌍성총관(雙城總管) 조양기(趙良琪)의 딸인 조씨(趙氏)와 재혼하고 의주에서 화주(和州, 함흥)로 거주를 옮겼다. 화주로 옮긴 것은 농업과 목축에 편리한 점도 있으나 후처인 조씨가 조휘(趙暉)의 손녀이므로 처가의 정치세력을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어느 날 도조의 꿈에 백룡이 나타나 "나의 거처를 빼앗으려 하는 흑룡을 몰아내 주십시오." 하며 부탁하였다. 도조는 이를 예사 꿈으로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얼마 후 꿈에 다시 백룡이 나타나 "공은 어찌 내 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며 와야 할 날짜까지 제시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도조는 기일에 활과 화살을 들고 약속한 곳으로 갔는데, 그 곳의 못 위에서 백룡과 흑룡이 한참 싸우고 있었다. 도조가 활로 흑룡을 쏘아 맞히니 흑룡은 못으로 떨어졌다. 뒤에 꿈을 꾸었는데, 백룡은 "장차 자손 중에 큰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선 개국 이후 1392년(태조 1년) 7월 28일 손자인 태조에 의해 도왕(度王)으로 존호가 올랐고, 1411년(태종 11년) 4월 22일 증손자인 태종 때 종묘의 4실에 존호를 가상하여 시호는 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 묘호는 도조(度祖)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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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桓王)대왕은 도조(度祖)대왕의 둘째아들이시며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아버지이시다. 휘(諱)는 이자춘(李子春) 자는 자춘(子春)이시며 배필은 최한기(崔閑奇)의 딸 의혜왕후 영흥 최씨(懿惠王后 永興 崔氏) 이시다.
능은 함경남도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위치한 정릉(定陵)이며, 의혜왕후의 화릉(和陵)도 같은 묘역에 위치해 있다. 환조대왕은 1315년 1월 20일고려 동북면 알동천호소에서 출생하셨고 1361년 6월 3일(음력 4월 30일) 함경도 영흥에서 서거하셨다. 슬하에 4남을 두셨는데 태조고황제와 이원계, 이천계, 이 화이다. 지난날 한때 고려 동북면 경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내다가 1318년경, 원나라 치하 간섭기에 고려국 역사의 비극 속에서 아버지 이 춘(李 椿)과 함께 잠시 원나라로 건너가 원나라의 천호로 있다가 1356년 고려 공민왕의 요청에 의해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참여하여 빼앗겼던 동북 영토를 99년 만에 회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대중대부사복경과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 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고 조선 건국 후 아들 태조고황제에 의해 환왕(桓王)으로 추존되었다가 손자인 태종 때 다시금 환조 연무성환대왕(桓祖 淵武聖桓大王)으로 추존되었다.
환조대왕이 영흥에서 서거하신 뒤 아들인 태조고황제는 통의대부 금오위상장군 동북면상만호(通議大夫金吾衛上將軍東北面上萬戶)가 되어 약관으로 정3품의 중앙무관직과 선조의 기반인 상만호의 두 가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는 태조고황제가 동북면의 토착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세력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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