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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와 조경단

mark.png조경단(肇慶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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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肇慶)”이란 말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우리 전주리씨 시조의 단(壇) 이름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우리의 시조 한(翰)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조경단은 바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나라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시조의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전주는 곧 우리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 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고황제가 나라를 연 직후에 그 산을 봉하여 지키게 하고, 전라도 책임자에게 잘 받들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전의와 읍지에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태조고황제와 영조대왕의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그 정성은 문헌으로 가히 징험될 수 있으되 지금에 와서는 아득하여 묘소를 알 길이 없으니 참으로 서글플 따름이다. 아, 이제 봉분을 높이 쌓아 올리고 싶으나 그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 열성조께서 미쳐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이리라.

 

이에 금년 봄에 재신(宰臣)을 보내어 왕자봉(王字峯) 아래 진좌(辰座) 언덕을 살펴보려 하였더니 전설에 내려오는 대로 아래위로 무덤의 형체가 있다 하므로 사방으로 산의 경계를 정하는데 정조대왕은 산을 봉하여 수호하던 절차에 따라 양지척(量地尺)으로써 땅을 측정했다.

 

동서로는 3,360척이요 남북으로는 3,520척이다. 또 영건청(營建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여 산소 형체의 앞에다 제사지낼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지내는 예를 올리게 하고 지키면서 받드는 관원 두 사람을 두어 모든 절차를 각 원(園)의 예 에 따르게 하니, 대저 우러러 아득하게 넓음은 하늘이요,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냄에는제기와 제수가 제 자리를 차지하여 그 경건한정성이 한결같을 것이로다.

 

선조의 시신이 묻힌 곳이 이곳이니 만약 산 전체를 묘역으로 봉한다면 어디에다 사모하는 정을 부치리요? 지금부터 자자손손 억만년 영구히 전례(典禮)가 되리로다. 아, 짐(朕)이 어찌 이런 전례를 만들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열성조께서 겨를이 없어 실천하시지 못했던 것을 오늘을 기다려 이어 행 한 한 가지 일일 뿐이로다.

 

완산(完山)은 전주부(全州府)의 남산이요,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 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mark.png조경단(肇慶壇) 비(碑)

 

이 비문은 고종황제가 친히 짓고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 : 1853∼1939)가 썼다.

 

이로 보면 우리의 시조할아버지의 묘가 이곳에 있었고 태조고황제도 관심을 기울여 묘역을 수호케 하였으며 특히 영조대왕은 대대적으로 정화 작업을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시조공의 묘소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 뒤 정조대왕도 산소 보존을 위하여 사방경계를 정하는 등, 여러 열성조가 선조 묘역 수호 보존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본격적으로 정화사업을 하여서 묘역을 넓혀 경내를 넓히고 단을 쌓아 “조경단”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와 비각도 세웠다.

 

그 때까지 내려오던 비가 있었으나 비문이 전부 풍마우세로 닳아 버리고 7자만 남았다는 내용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899년(고종 광무 3) 4월 8일에 묘소 앞에 조경단을 쌓고 5월 25일에 묘소 위에 흙을 더했다고 <선원계보기략>에는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까지는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조경단의 영역은 광복전까지 450 정보 곧 135만평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전북대학교 등 각종 관서의 부지로 거의 뺏기고 지금은 묘역과 재실을 합쳐 10만평도 남아 있지 않다.

 

또 조경단 영역은 현재 약 9천평 정도로 둘레의 담을 쌓은 것도 1972년 당시 환의(桓儀) 종약원 이사장이 전북도지사로 있었고, 해권(海權)종현이 부지사로 있을 때 당시 대통령에게 간청하여 예산을 얻어 지금과 같이 정화했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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